LIFE 작가의 말/곡 소개

작가의 말

한 사람의 인생이 어떻게 펼쳐질지는 그 인생을 살아내는 당사자도 알 수 없는 신비한 것이기도 하다. 나의 어릴 적 꿈은 아나운서나 성우가 되는 것이었지, 명상가가 되리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다. 책을 쓰게 된 것도, 또 이번처럼 음반을 내게 된 것도, 내 마음의 흐름을 타다 만나게 된 하나의 소중한 인연이었다. 
나의 음악과 함께 한 여행은 5살 때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집에 있는 피아노를 뚱땅거리며 놀다가, 7살부터 11살 때까지는 여느 아이들처럼 바이엘 하농 체르니 등을 배웠다. 그 이후부턴 좋아하는 팝송이나 가요 등을 악보를 보고 연주하거나, 기억나는 곡은 그냥 내 맘대로 편곡해서 쳐보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더 이상 악보를 보거나 남의 곡을 치는 것이 아니라, 즉흥적으로 감정이 이끄는 대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건 마치 가슴과 손가락이 연결되어 있어서 내가 한 음 한 음을 누를 때마다 내 가슴 안의 내밀한 공간이 열려가는 듯했다. 그러면서 난 그 공간을 조금씩 탐색하며, 그 안에 들어있는 온갖 감정들, 성남, 슬픔, 외로움, 기쁨 등을 손가락을 통해 소리로 표현해 냈다. 
그렇게 가슴 안의 공간을 자유롭게 거닐다보면, 그 속에 있는 진짜의 나, 더 깊은 나, 벌거벗겨진 그대로의 나와 만나는 듯했다. 그래서 가슴이 뛰고 설레었다. 난 음악이 만들어 낸 공간 속에서 온전한 나로 존재할 수 있었고, 그 속에서 무한한 평온을 느꼈다. 
내가 나누고 싶은 건 누구나 갖고 있는 그 가슴 안의 "공간"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일 수 있는 "자유"이며, 그 속에서 몸과 마음이 기대어 쉴 수 있는, 형언할 수 없는 "평온함"이다. 
내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그리고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그 "공간"에서 마음껏 거닐길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곡 소개

[봄에서 겨울로..]
*(Improv.) 라고 되어 있는 곡들은 즉흥 연주(Improvisation)로 즉석에서 한 번에 녹음된 트랙입니다.

1. Budding (Improv.) - Intro: 봄의 문턱

어느 날 피아노에 앉아 무심코 떠올랐던 느낌과 선율을 그대로 따라간 것이다. 녹음한 걸 들어보니, 왠지 봄의 초입 같은 느낌이 들어서 “budding”이란 이름을 붙여봤다. 

2. Lovers Dance - 이른 봄

2014년의 어느 봄날, 건반 위에 손가락을 얹고 마음 가는 대로 연주를 하다가, 물 흐르듯 부드러운 감성이 살아나와 그 모티프를 따와서 만든 곡이다. 곡을 녹음하고 나서 들어보니, 두 연인이 마치 대화하듯이 번갈아 춤을 리드하며, 댄스홀을 마음껏 누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매우 낭만적이고 부드러우며 가볍지만 때론 격정적이기도 한, 밀도 있는 감성을 녹여낸 곡이다.  

3. Born in Light - 늦은 봄

12년 전, 호주의 어느 녹음 스튜디오에서 마음 가는대로 쳤던 피아노 즉흥 연주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어느 늦은 봄날, 문득 떠올랐던 선율을 합쳐본 것이다. “빛에서 태어나다”는 제목처럼, 호주의 밝은 태양과 바닷가, 유난히 맑고 파란 하늘, 아름다운 초원, 석양에 지는 노을빛과 나른한 분위기, 이 모든 것을 담아낸 것이다. 특히 이 곡은 우울하거나 기운이 쳐져 있을 때, 피부 속 깊은 곳까지 생기와 따뜻함을 가득 채워줄 것이다. 

4. Summer Sings - 한여름

작년 한여름, 매미들이 찌르르 우는 소리가 서로를 확인하고 주고받는 대화처럼 들려서, 그 느낌을 피아노에 옮겨 본 것이다. 제목도 처음엔 Cicadas Singing(매미 소리)였다. 그러나 매미 소리는 소음 공해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으니 제목을 바꿔보라는 제안을 받고 Summer Sings라 지었다. 이 곡은 매미 뿐 아니라, 숲 속에 살고 있는 다양한 동물들이 주고받는 이야기, 시원하게 쏟아지는 굵은 소나기, 소나기 후 더 밝게 살아난 듯한 숲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연주한 곡이다. 

5. Step into Fall – 초가을

내가 오랫동안 살았던 제 2의 고향, 보스턴의 아름다운 가을을 연상하며 만들어 본 곡이다. 보스턴 시내는 하나가 커다란 박물관인 것처럼 고풍스런 벽돌 건물과, 오래된 전차/지하철, 유럽풍의 까페 거리 등이 정감 어린 인상을 주는 곳이다. 가을이 되면 아름다운 색깔의 단풍들이 고풍스런 건물과 어우러져 여간 멋스럽지 않다. 이 곡은 보스턴의 떨어지는 낙엽과, 밟힐 때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즐기며, 가볍게 춤추듯이 걷는 모습을 연상하며 만든 곡이다. 

6. Longing Heart - 늦가을

한 음 한 음 마치 간절히 기도하는 듯한 느낌을 표현한 곡이다. 기도의 대상은 분명치 않으나, 닿고 싶은데 닿을 수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향한 열망, 돌아오지 않는 것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 ‘언젠가는’이라는 희망을 향한 간절한 기다림 등의 정서를 담고 있다. 마치 어떤 곳을 향해, 온 감각을 집중해서, 정성스럽게 한 발 한 발 계단을 내딛으며 올라가는 느낌이기도 하다.

7. Life - 인생

이 앨범의 타이틀 곡이자 앨범 탄생의 계기가 된 가장 의미 있는 곡으로, 2013년 7월 데이빗 란츠의 Piano Improvisation 워크숍에서, 선생님 앞에서 즉흥 연주한 것을 거의 그대로 살려낸 곡이다. 라이프(인생)이란 제목처럼 이 곡의 첫 부분은 마치 처음 세상에 나와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신기한 어린아이처럼, 설레고 두려운 마음을 담고 있다. 
데이빗 란츠 선생님이 옆에서 보고 계신다는 생각에, 흥분에 떨리는 손가락들을 조심스럽게 피아노에 얹었다. 그리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려, 숨을 반복적으로 길게 내 쉬면서, 내 가슴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감정의 굴곡을 부지런히 건반 위에 담아내었다.
마치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게 될 진 모르지만, 매 순간의 경험과 느낌을 최대한 진실되게 살아내려는 것처럼, 피아노 선율은 점점 고조되기도 했다가 사그러들기도 하면서, 잔잔히 우리의 마음을 적신다. 그리고 마지막엔 후렴구가 반복되며, 가장 맑고 순수했던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길을 열어준다.

8. Waving Aurora (Improv.) - 겨울

작년 여름, 아무 계획 없이 건반 앞에 앉아 마음 가는 대로 연주한 즉흥곡이다. 녹음한 곡을 들어보니, 여름 날씨와는 맞지 않게 겨울, 북구, 얼음이 뒤덮인 흰색 공간의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곡의 느낌은, 아스라이 먼, 얼음이 덮인 하얀 공간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사람이 발길이 닿지 않아 맑고 청명하고 순수한, 어찌 보면 시리도록 외로운 공간. 저 멀리 오로라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며, 춤추듯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듯하다. 나도 얼음이 깨질까 사뿐사뿐 걸어서 빛나는 오로라가 있는 그 공간으로 걸어간다.

9. White in Distance (Improv.) - Outro: 

겨울의 끝

이 곡은 바로 위의 Waving Aurora에서의 느낌을 그대로 이어간 짧은 즉흥곡이다. 오로라의 찬란한 빛이 넘실대는 공간에서, 나도 함께 춤추며 어우러진다. 오로라의 몸짓이 조금씩 사그라들면서, 다시 드러나는 순백의 공간...내 마음엔 긴 여운이 남는다.     

글 / 정수지